중세 유럽 온천_by 성지식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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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4 03:20
도를 깨우친 큰 스님들은 임종을 앞두고, 거울이나 샘에 비친 자신의 육신을 향해 ‘나와 벗하여 오랫동안 살아왔구나. 이제 편히 쉬거라.’라는 열반송(涅槃頌)을 남겼는데, 불교가 일천한 서양에서 전해져 ‘젊어지는 샘’이란 전설을 만들어 냈다.
십자가 전쟁으로 불교문화를 접한 서양인들은 득도한 스님들이 샘에 들어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고 여겼다. 해서 지구상 어딘가에 신비의 샘이 있어, 그 물로 목욕을 하면, 다시 젊어질 뿐만 아니라 처녀성을 되찾는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매년 5월 1일에 목욕을 하는 축제가 내려오고 있는데, 신비한 샘을 찾지 못했기에 경치가 좋은 곳에 야외 목욕탕을 만들어 몸을 씻는 제례의식을 가졌다. 이때, 목욕을 마친 여인들은 처녀막이 다시 생겨났다고 굳게 믿고, 젊은이로 거듭난 남성들과 짝을 지어 숲으로 들어가 환희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 남자와 수없이 관계를 가져도 목욕만 다시 하면 처녀가 될 수 있었기에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성에 탐닉했다. 이러한 관습이 훗날 음란한 온천풍속을 만들어 냈으니, 중세 유럽의 온천장은 귀족과 돈 많은 상인을 유혹하려는 여성들의 집합소이자 광란의 소굴이었다.
따라서 서양의 신비한 샘은 타락한 성문화에 면죄부를 주는 풍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양에는 여성의 음란한 욕구를 억누르는 풍속이 있었다.
중국의 북쪽 지방인 포자촌에 작은 샘이 있는데, 모양이 음부 형태이다. 물줄기를 따라 둔덕과 크고 작은 바위가 배열된 모습이 음순과 음핵처럼 생겼는데, 음순 안에는 곡식이나 풀을 심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음순 형태의 둔덕을 ‘갈마전’이라 불렀는데, 갈마(渴痲)는 성에 목마른 여인이란 뜻이다. 갈마전에 무우를 심었다가 크게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아녀자들이 모두 음탕하게 변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로 갈마전에 곡식을 심는 것은 물론이고 발을 딛는 것조차 삼갔는데, 무는 남성의 심볼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유사한 일화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안동에 있는 공알(陰核)산이다. 여음을 닮은 이 산의 깊은 계곡에 샘이 있는데, 사시사철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물이 흐른다. 이를 여인들의 음풍을 부채질하는 형상이라고 여겼으니, 처방으로 공알산이 마주 보이는 곳에 커다란 남근석을 세 개나 세웠다고 한다.
음기가 강한 여근산을 휘어잡기 위해서는 남근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지형이나 바위 등의 생김새가 심볼을 닮았을 경우 이를 신물(神物)화 하는 것은 세계 공통의 민간 신앙이다. 다만 서양이 이를 빙자해 방종한 성문화를 즐겼다면 동양은 성을 통제했으니 문화적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전쟁으로 불교문화를 접한 서양인들은 득도한 스님들이 샘에 들어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고 여겼다. 해서 지구상 어딘가에 신비의 샘이 있어, 그 물로 목욕을 하면, 다시 젊어질 뿐만 아니라 처녀성을 되찾는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매년 5월 1일에 목욕을 하는 축제가 내려오고 있는데, 신비한 샘을 찾지 못했기에 경치가 좋은 곳에 야외 목욕탕을 만들어 몸을 씻는 제례의식을 가졌다. 이때, 목욕을 마친 여인들은 처녀막이 다시 생겨났다고 굳게 믿고, 젊은이로 거듭난 남성들과 짝을 지어 숲으로 들어가 환희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 남자와 수없이 관계를 가져도 목욕만 다시 하면 처녀가 될 수 있었기에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성에 탐닉했다. 이러한 관습이 훗날 음란한 온천풍속을 만들어 냈으니, 중세 유럽의 온천장은 귀족과 돈 많은 상인을 유혹하려는 여성들의 집합소이자 광란의 소굴이었다.
따라서 서양의 신비한 샘은 타락한 성문화에 면죄부를 주는 풍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양에는 여성의 음란한 욕구를 억누르는 풍속이 있었다.
중국의 북쪽 지방인 포자촌에 작은 샘이 있는데, 모양이 음부 형태이다. 물줄기를 따라 둔덕과 크고 작은 바위가 배열된 모습이 음순과 음핵처럼 생겼는데, 음순 안에는 곡식이나 풀을 심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음순 형태의 둔덕을 ‘갈마전’이라 불렀는데, 갈마(渴痲)는 성에 목마른 여인이란 뜻이다. 갈마전에 무우를 심었다가 크게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아녀자들이 모두 음탕하게 변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로 갈마전에 곡식을 심는 것은 물론이고 발을 딛는 것조차 삼갔는데, 무는 남성의 심볼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유사한 일화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안동에 있는 공알(陰核)산이다. 여음을 닮은 이 산의 깊은 계곡에 샘이 있는데, 사시사철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물이 흐른다. 이를 여인들의 음풍을 부채질하는 형상이라고 여겼으니, 처방으로 공알산이 마주 보이는 곳에 커다란 남근석을 세 개나 세웠다고 한다.
음기가 강한 여근산을 휘어잡기 위해서는 남근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지형이나 바위 등의 생김새가 심볼을 닮았을 경우 이를 신물(神物)화 하는 것은 세계 공통의 민간 신앙이다. 다만 서양이 이를 빙자해 방종한 성문화를 즐겼다면 동양은 성을 통제했으니 문화적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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