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식기 숭배와 성교 숭배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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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생식기 숭배와 성교 숭배
  원시 사회의 생식 숭배는 여성 숭배로 나타났고, 여성 숭배는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숭배로 발전해 갔다. 원시 시대 사람들은 생식 기관의 기능에 대해
명확한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결합하여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난자와 질의 분비물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단지 난자와 자궁 그리고 음문의 모든 분비물을 "음"의 기,
즉 정자가 태아가 되는데 필요한 자궁의 안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자
혹은 정액을 뜻하는 "정"은 남성의 정자를 뜻하는 말로만 사용되었고, 난자는
"기" 혹은 "혈"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원시 시기 인간들이 생식 숭배를 생식기 숭배와 결합시킨 것은 생식과 남녀
생식기의 관계를 알고 난 후의 일이다. 그들은 남성 생식기를 토기와
연결시켰기 때문에 남근 상징물을 "전조", "전주"라고 했다. 이때부터 남성이
정액이 생식에 있어 특수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물"로 정액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시경.소아.포전]에서는 상고인들은 어전조("어"는
맞이한다는 의미이고, "전조"는 농사를 처음 시작한 신농씨이다.)를 맞이하여
비와 물을 강말하고 곡물의 수확이 풍성하고 인구의 번창함을 바랐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어전조"는 주로 밭에서 파종할 때, 남녀의 성교로써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땅으로 질을 상징하고, 씨앗으로 정액을 상징한다.
남녀의 성행위를 "파종", "경누"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음"과 "근"은 남녀의 생식기, 즉 "음"은 여성의 생식기인 음부를
가리키고, "근"은 남근을 가리킨다. 남성 생식기의 우상은 그것이 발기하여
우뚝 선 모양이며, 여성 생식기의 우상은 옆으로 늘어난 모양이다. 사람들은
생식기 우상에게 경건한 자세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시간이 흐르고 경혐이 쌓이면서 남근이 음부와 접촉하여 임신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점차 남근(원시 시기 문화 유적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새
무늬는 남근이 상징이다. 새머리는 음경과 유사하고, 새가 알을 낳듯이 남근
또한 알(고환)을 가지고 있으며, 알의 흰자위와 정액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숭배현상이 보편화되어 갔다. 모계 사회로부터 부계 사회로의 전이가 남근
숭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남근 숭배의 부계 사회의 확립 이후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계 사회의 후기, 혹은 중기에 이미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와의 성행위를 통해서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 주의했고,
남자는 한 생명을 창조하므로 영예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태아는
아버지의 싹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며, 어머니는 단지 식물의 씨가 대지로 들어가
자라는 것처럼 그것의 발육 장소를 제공할 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여신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호전적이고
용맹한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성교 숭배는 본래 생식과는 무관하며, 성충동과 성행위를 통해 느끼는 고도의
성적 쾌감 속에 신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숭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교
숭배는 원시 시기 인간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영향은 그 당시 문화
생활의 여러 방면에 나타난다. 가령 그들이 거행한 "어제", "고기제"등과 같은
제사 활동은 모두 성교 숭배의 한 표현 양식이다. 제사 활동에 참가한 남녀는
야합함으로써 신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고 자손과 곡물의 번성을 기원했다.
이들은 성행위와 생식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성교 숭배를 생식 숭배와
유사란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성행위와 생식의 인과 관계에 대해
인식의 깊이를 더해 갔다. 이 두가지 숭배는 점점 하나로 합쳐졌고, 사람들은
성교에 대해 더욱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성교 숭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성교의 목적은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을 얻는 것과, 성행위를 통해 남성은
여성의 음기를 흡수하여 생명력을 강화시킨다는 양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후사 있는 문제를 중시한 이유는, 난링자란 종족 번창의 의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식이 없으면 윗 조상들이 "혈식"을 먹지 못하게 되고
제사를 받지 못하므로 후사는 중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제사가 끊어지면 후손과 조상을 연결해
주는 덕이 줄어든 조상이 후손에게 재난을 안겨 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묘당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사내아이를 생산하는 일은 조상들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이 대를 이을
자식을 중시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은 생식 숭배와 밀한 관련이 있다.
  이렇듯 중국의 성 풍속은 음양 문화와 깊이 관련되며, 생식 문화와도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농경 사회의 중요한 의색 행위였던 생식 의식은
여성에 대한 찬미와 숭배로 이어졌으며, 아울러 생식기와 성교자체를 숭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원시 시대에는 성적 관행에 대한 비밀이 유난스럽게 추구되지 않았으며, 성에
대한 어떤 관용적이고 무람없는 태도가 조심스럽게 유지되고 있었다. 성 숭배는 
중국의 성 문화를 개방화된 논의 방향으로 이끌려는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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