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완전 불륜을 꿈꾼다_by 성지식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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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9 12:20
나는 완전 불륜을 꿈꾼다
“오이병 과장님 사모님은 참 좋겠어요.
요즘 세상에 오 과장님처럼 다른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남자가 또 있을까요?”
또, 또. 나는 그저 씩 웃고 만다. 2년째 매일같이 보아온 얼굴이지만, 하시라 대리가 자꾸 저런 얘기를 하는 속내를 도통 모르겠다. 처음엔 유혹의 방편인 줄 알고 자못 기대되기도 하고 동시에 몸도 사렸지만 최근 들어 단순히 날 놀려먹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짙어졌다. 꼭 여러 사람이 있을 때만 저런다. 날 물로 본다는 거지. 큼.
그녀말고도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부처님 가운뎃토막이나 서화담 선생이나 절대 도덕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오히려 나는 바람피우는 사람 얘기를 들으면 부러워하고, 이런저런 여자가 멋지고 예쁘다는 소리도 자주 하고, 예컨대 <툼 레이더2>를 보고 안젤리나 졸리(의 몸)밖에 볼 게 없는 영화라며 솔직하게 평하기도 하고, ‘하렘은 모든 남자의 꿈’이란 말도 서슴없이 내뱉곤 하는데. 사람들이 거짓말로 날 놀리는 게 아니라면, 왜 날더러 절대 바람피울 타입이 못 되는 남자라고 하는지 요령부득이다.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보든지간에 나는 지금 모종의 꿍꿍이를 키우고 있다. 나, 오이병, 나이 서른여섯, 결혼 6년차의 남편, 세 살 연하의 아내와 다섯 살배기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가장, 중소기업도 못 되지만 망할 일 없(다고 믿)는 회사의 마케팅과장, 본의든 아니든 주변 사람들이 좋게만 봐주는 이 남자는 현재 불륜을 저지르기 1년 11개월 15일 전이다.
바람피우고 싶어 죽겠다. 이런 생각이 맴돌기 시작한 게 벌써 5년이다. 그러니까 서른이 넘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데, 가만 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마디 하나를 넘기기 전에 시한부(時限附)로 가능한 무엇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장학퀴즈에 나가보고자 몸부림을 쳤다. 졸업하면, 고등학생이 아니게 되면 못 나가잖아. 대학교 시절엔 내 일생에 부모 돈으로 지내는 마지막 시간임을 감지하고 전국의 명산에 죄다 눈도장을 찍었다. 제대 후 4학년에 복학해서는 지금 아니면 언제 가능하랴, 여름방학 때 기어코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심지어 나는 20대 때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내 인생 중에서 가장 정력이 왕성한 나이다. 이 나이 다 보내고 힘 빠져가기 시작할 때 섹스를 시작한다는 게 아깝다. 우리 결혼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싱싱한 사과 사놓고 시들면 먹을 거냐.”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두가 맞는 말이었다.
지금도 딱 그렇다. 30대를 보내기 전에 바람을 피워봤으면 좋겠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대단한 정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런고로 아직 정력에 여유가 있을 때 조금만, 다른 데 소보고 싶다. 나의 외도 희망은 내 성기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내 머리에서 점화됐다. 전두엽에서 출발한 생각은 5년 동안 슬금슬금 자기 분열을 거듭하며 증식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가마 꼭대기에 아예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아, 바람피우고 싶어라.
나는 계획적인 인간이다. 꼼꼼하다는 데 있어서는 회사에서 날 따라올 자가 없다. 3년 전 승진 무렵에 내 보직을 놓고 이사와 사장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사장은 오이병이 꼼꼼하니 자재과장으로 보내자고 했고, 이사는 계획적이며 사람 잘 챙기고 일 잘 챙기는 사람을 대외 업무가 많은 마케팅팀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나야 뭐, 전통의 꽃보직인 자재과를 희망하긴 했다만서도.
‘박통’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장은 몇 달 전에 우리 회사의 ‘10배 성장 10개년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단 나는 보고서 양(量)으로 점수를 땄고 치밀한 내용으로 한 번에 결재를 받았다. 사내에서 ‘역시 오 과장’이라는, 인정과 질시의 함량이 반반인 한숨이 돌아다녔지만 사실 별것도 아니다. 우리 사장 타입의 보스에게는 ‘12시 점심식사’ 대신 ‘12:00 점심식사 착수. 12:02 엘리베이터 탑승. 12:06 논두렁 식당 착석. 12:07 보리밥 정식 주문…’ 이렇게 쓰면 만사 고속도로다. 내가 실제로는 느지감치 계단을 걸어 내려가 별해감집에서 추어탕을 먹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천기누설하는 김에 하나 더 알려줄까? 사람들은 처음부터 급변할 가능성이 있는 계획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보통 어떤 계획도 꾸리지 않는다. 뭐가 됐든 완벽한(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계획을 수립해놓으면 그 목표를 완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잘된 계획은 그 자체로 나를 끌고 간다. 논두렁 식당에서 보리밥을 먹겠다는 프로젝트를 내면 나는 십중팔구 거기서 그걸 먹게 될 것이다.
나는 미소를 걸고, 영업부 노 과장은 어금니를 깨물고 이사실을 나섰던 한 달 전의 일이다. 노 과장에게 천기누설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나의 별것 아닌 요령을 일러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했다. 그래, 계획을 짜자.
사람들이 영 잘못 본 것은 아닌 게,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내 아이에게도 소홀하지 않으려 애쓴다. 내 가족이 살고 있는 공간을 보다 근사하게 만들려는 노력도 끊임없다. 내 마음은 변함이 없으며 내가 선택한 길에도 후회가 없다. 그런데 말이지, 내가 지난 반평생 쌀밥을 먹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도 가끔은 수제비나 빵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다. 그 여자를 쉽게 구하고 싶지는 않다. 돈 내고 사 먹는 삼청동 수제비보다, 신라호텔 베이커리의 스폰지 케이크보다, 깨물 때마다 설익은 밀가루 묻어나는 수제비나 덜 부푼 피자 도우처럼 납작한 빵이 맛있을 때가 있다. 내가 만들었을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꼭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서 요리책 펼쳐놓고 주섬주섬 반죽부터 시작했을 때. 5000원, 5만원이면 될 것을 1만원, 10만원 들여서 그런지 더 맛있다. 나는 그렇게 연애해서 사귄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다.
아내를 사랑한다며 어떻게 다른 여자와 섹스할 계획을 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계획이 필요한 것이라고.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면 계획이 왜 필요하겠는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면 아내와 이혼할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단지 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갖는 한 번의 섹스를 원하는 것이다. 아내가 상처받는 것도 싫고, 내가 구축한 이 작은 세계가 붕괴되는 것도 싫다.
치사하다고? 맞는 말이다. 지독한 이기주의자라고? 맞는 말이다. 불륜이라고? 맞는 말이다. 배신이라고? 맞는 말이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내 문제다. 나말고 그걸 알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이다. 그리고 신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 내 배신 여부에 대해 도대체 누가 내게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진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뚜껑을 열기 전에는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생사에 대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손 치더라도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온전히 고양이 자신만이 알고 있다. 나는 그 뚜껑을 단단히 붙들고 있을 것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은 정보로 존재한다. 알아야 진실인 거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라는 건 내가 그걸 알기 때문에 진실이 된다. 만약 석 달 전에 무슨 변괴로 말미암아 K2가 딱 250미터 융기했다고 해도, 그걸 모르는 내게는 여전히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이다. 어떤 진실이건 그것을 부정하는 정보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내가 내 계획의 존립 근거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이 억지 논리는, 물론 내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안다. 어차피 나 역시 ‘아내의’ 진실은 모르고 있으니. ‘내게 있어’ 진실은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다는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회사에서 POP 시안들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동안 아내가 무얼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알아내야 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나는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만하면 공평한 조건 아닌가?
2년 뒤면 홀로 계신 장모의 환갑이다. 그때 나는 훌륭한 사위인 동시에 멋진 남편의 탈을 쓰고자 한다. 이렇게.
요즘 평균수명이 길어져 환갑 때는 보통 잔치 안 하니까 대신 여행을 보내드리자, 유럽처럼 거리도 멀고 일정이 길어 체력이 필요한 여행은 더 나이 드시기 전에 다녀오시는 게 좋다, 어머님 혼자 여행하시긴 힘들 테니 당신이 모시고 가라, 당신도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 잊고 모처럼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보라, 아이는 우리 부모님께 부탁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시부모에게 아이 맡기는 게 꺼려진다면 처제네도 있지 않느냐, 나 역시 휴가를 내서 가능한 한 민폐 끼치지 않게 아이와 함께 낚시도 가고 여행도 할 예정이다, 내가 이 선물을 준비하며 2년 전부터 적금을 들어놨으니 경비는 모두 내가 대겠다….
2년 후에 내가 말할 이 내용은 모두 진실이다. 감추어진 진실은 적금 통장이 2개라는 것, 그리고 그 숨겨진 진실로 통하는 문은 ‘가능한 한’이라는 말이다. 적금 하나는 장모와 아내를 여행 보내는 데 쓰고, 불입 금액이 보다 적은 다른 하나는 물론 내 불륜 자금이다. 가능하다면 여행 기간 내내 내가 아이를 돌보고 싶지만 휴가를 열흘이나 받을 수는 없을 테니 부득이하게 며칠은 어디 맡겨야 하지 않을까? 손주라면 사족을 못 쓰시는 할아버지 댁이 적당하겠지. 애도 시골을 좋아하고.
나 혼자 지내는 그 며칠이 내 계획의 디데이다. 나는 그 며칠을 위해 2년을 투자하는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내가 섹스를 나눌 불륜의 상대는 1년 뒤에 물색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내게 지금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1년 뒤에, 내 인생에 유일―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렇기를 희망하는데―한 외도의 파트너가 될 영예의 주인공과 대뜸 연애를 시작할 것도 아니다.
내가 구할 외도 파트너 후보는 한 명이 아니다. 여러 명을 후보선상에 올려두고, 적당한 간격으로 각 후보들과 접촉하고 인사를 나누며 당장의 음심 없이 가볍게 1년여를 만나면서 의중을 헤아린 다음에 최종적인 ‘간택’은 아내와 장모를 위한 여행을 예약할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다. 공항에서 모녀를 전송하고 돌아와 나는 ‘그녀’를 만나 내 계획의 핵심이 될 ‘작업’에 착수할 테다. 마치 영화처럼 짧고도 강렬한, 단지 사흘에 걸친 일회성 불륜!
후보 선택에서부터 최종 간택에 1년이라는 긴 시간을 배정한 것은 단 한 번의 일탈로 그칠 예정이기 때문이다. 매사는 불여튼튼일지니. 이런 내가, 나 자신도 놀랍다. 흠.
내가 불륜 2개년 계획표를 세운 게 보름 전이다. 아내 몰래 2년짜리 적금 통장 2개를 만들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주사위는 2년을 돌고 구른 다음에야 멈춰설 것이다. 그동안 나는 부푼 꿈을 안고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망상에 빠뜨리며 걷잡을 수 없도록 대뇌를 잠식하던 불륜 욕구도 장도(長途)에 오른 지금은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저런, 오해는 참아달라. 욕구가 사그라든 건 아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 죽을 지경일 때와 ‘그래 가자, 어디로 갈까?’ 즐거운 가상의 여정을 꾸릴 때와의 차이랄까?
2년 뒤에, 내가 던진 주사위가 멈춰 하나의 눈을 드러낼 때, 나는 비로소 결정할 것이다. 아무도 모를 나의 일탈 여부를.
나는 그렇게 완벽한 불륜을 꿈꾸고 있다. 물론 완전 범죄란 없다. 당연히 완전 불륜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완전하지 못한 까닭에 불완전 범죄가 완전 범죄처럼 ‘보일’ 수 있듯이, 내가 기도(企圖)하는 것은 다만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불륜일 뿐이다.
추신: 하시라 대리는 후보에서 배제해야 할 1순위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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