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 영국인의 우울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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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영국인의 우울
일본산 영국인으로 불리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89)는 당대 제일의 하이
칼라였다. 지금은  하이칼라라는 말이 거의  안 쓰이지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취향이 새롭거나 서양식  유행을 따르는 멋쟁이 신사를 그렇게 불렀다.  20대 초
에 영국 런던 대학에서 공부했던 모리는 일본의 후진성을 통탄하고 신흥 일본의
건설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각오를 했다.  무사들이 신분의 상징으로 허리에 칼
을 차고 다니는 꼬락서니는  이미 낡아빠진 구습이라고 비난하다가 관직에서 쫓
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모리는 일본이 선진 유럽의 대열에  끼기 위해서는
일본 인종을 개량해야 하고  교육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
던 진보적 개혁주의자였다. 일본의 장래를 책임질  인재육성을 위해서는 교양 있
는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지 5년
째 되던 1872년에는 처음으로  여자 아이들도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도
록 했다. <여자가  한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고루한 생각이 채
가시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자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과  함께 훌륭한 인재에 걸
맞는 신부감 양성소로 여자 영어학교와 개척사  여학교를 세웠다. 서양 교사들이
초빙되어 양가집 규수를 신식으로 교육시켰다.  <개척사 여학교>는 북해도 자원
개발을 꿈꾸는 개척꾼들의 반려자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계발하는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12∼16세  사이의 재능있는  여학생들을 50명쯤 선발하여  서양
언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청년 모리는 이 학교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라이만이
라는 지질학 선생을 추천하였는데  염불보다는 잿밥에 마음이 있었던지 그는 쓰
네(常)라는 여학생에게 반해 관계기관에 정식으로  제자와의 결혼을 신청하는 해
프닝을 일으켰다. 이같은 염문 소동이 계기가  되어서인지 모리는 쓰네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뛰어난  미모에 총명함과 발랄함이 넘치는 진보적인 성향을  띤 아
가씨였다. 그러나 모리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처녀가 있었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신사로서 결혼의 약속을  어긴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쓰네의 마술
적인 매력에는 눈이  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리를 첫사랑의  연인에게 사범대학
을 졸업할 때까지 일체의 학비를 부담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모리는 28세  때 8세 연하의 쓰네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라이만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  채 안되었던 때였다. 그때  그들의 결혼식 전말은  매스컴의 대대적인
보도로 장안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하
였던 일본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가 서양식 예복 차림의 신랑과 엷은 쥐색의 양장에 하얀 베일을 쓴 신부를 앞에
두고 혼인 서약서를 낭독했다. 일본의 혼례식  전통을 파괴한 파격적인 결혼식이
었다. 식후에는 현대판 결혼 피로연을 개최하여  두고두고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
었다. 모리의 자신의 결혼식을 통해서, 아직은 개화가 뭔지도 모르는 일본인들을
개명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려  했다. 부부는 모름지기 남녀 동
등의 원칙에 따라, 서로가 합의한 혼인 서약에  의해 맺어져야 한다는 평소의 지
론을 행동으르 보여준 셈이다. 언론에서는 일본  최고의 신식 부부의 탄생을「모
리의 쾌거」,「모리 하이칼라의  결혼」,「문명 개화의 결혼」이라고 대서특필하
였다.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혼인 서약을  둘 중의 한 사람이라도 어기
면 헤어져야  한다는 해설기사도 덧붙였다.  지금부터 120년전  일본에서 있었던
혼인 잔치의 전말이다.  결혼 4년 만에 모리는 특명 전권  공사로서 영국에 부임
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대사이다. 대사 계급이라고  하지만 모리 32세, 부인 쓰네
24세 때였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발랄한  일본 마나님은 단번에 런던외
교가의 스타로 떠올랐다.  쓰네는 아이를 둘이나 생산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웠
고 오히려 풋풋한  아름다움에 농염한 자태마저 스며들어  고혹적이었다. 빅토리
아 여왕도 알현하여 외교가의 시샘을 자아내기도  했다. 귀부인에게 걸맞게 미술
전람회, 유적 관광, 음악회 순례로 런던 생활 4년을 한껏 즐기며 물 만난 고기처
럼 런던 사교계의 꽃으로  얼굴을 안 내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최초의 국
제인 모리 공사의  표정은 부인의 표정과는 달리 우울하기만 했다.  심심찮게 들
려오는 부인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봉급의 태반을  부인의 의상비로 지출해야 했
던 그로서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일본적 정취가 없는  쓰네에게서 사무치
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녀 동등권의 전도사를 자처한 그로서  자기 부인
을 가정이라는 새장  밖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주위의 잡새들이  가만두지를 않
고 사교라는 이름의  먹이를 던져 끊임없이 유혹해 냈다. 1884년  4월 런던 생활
을 끝마치고 귀국해야 했다. 모리의 전기를 보면  그해 12월에 장녀의 출생 신고
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치다 로안(內田魯庵)의《추억의 사람들》이란 책에「
모대신의 부인이 머리털에 푸른 눈의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대신
은 다름아닌 모리를  지칭한다. 해괴한 소문이 떠돌고 있는 가운데도  모리는 귀
국 이듬해에 이토 총리에 의해 최연소  각료로서 문교장관에 발탁되었다. 영국에
서 귀국한 후  8개월 만에 출생 신고를  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쓰네가 한참
사교계의 꽃으로 날리던 런던 무대에서 임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교장관에 취
임한 지 얼마 안되어 모리는 성격차이란 이유로 결혼생활 10년을 이혼으로 마감
했다. 이혼 사유도 국제인다웠다. 기이하게도 모리는 생후 2년 수개월 된 고명딸
을 양녀로 보내 버렸다. 일본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둘은 모리가 재혼을 한 후에
도 계속 키웠는데, 어째서  셋째 아이는 양녀로 가야 했을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녀를  양녀로 보낸 1887년에  모리는 쓰네는 자작  칭호를 받았다.
일본의 자작과 푸른 눈의 딸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혼 이
후 정신적 우울증이 생겼다는 풍설이 있긴 하나 그야말로 모리 주위에서 바람처
럼 사라졌다. 모리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쓰네의 기록은 거의 없다.
언제 어디서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 구름에게나 물어봐야 할 형편이다. 푸른
눈의 요정의 출생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일설에 의하면, 인종개량주의
자인 모리는 태교를 신봉하여 임신부가 좋은 책을  읽으면 머리 좋은 아이가, 아
름다운 것을 보고 있으면  예쁜 아이가 태어난다고 믿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모
리는 태교의 하나로서 부인에게 영국인 미남 청년을  옆에 두고 그의 오똑한 코,
잘 생긴 이마, 깊은 눈을  쳐다보고 있도록 했다고 한다. 태교의 효과가 기가 막
히게 잘 나타나서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의  장녀를 얻었던 것일까. 자기 마누라도
제대로 건사 못하면서  태교에 빠진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모리는 쓰네와
이혼한 다음 해에 명문가의 딸로서 1남1녀의  어머니인 히로코와 재혼하였다. 둘
다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그러나 별탈없이 지내던  중 모
리는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무리는 문교장관으로서 일본의
개혁을 위해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보수 계층이
향수를 느끼고  있는「제국」이라는 말은, 그가「Imperial University  Of Tokyo
」를「동경제국대학」으로 번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대일본제국」건설
이 그의 야망이었다. 이상주의자  모리의 암살을 자초한 계기는, 그가 한자 투성
이의 일본어를 폐지하고 영어를 국어로 쓰자는 과격한 교육 개혁안을 들고 나왔
던 때문이었다. 일본어는  일본 본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한자에서 따
온 것이 많다, 남의  나라 말을 차용해서 쓸 바에야 국제어를  모국어로 하는 것
이 상책이라는 주장이었다. 모리는 어떤 의미에서 일본 국제화의 선구자였다. 모
리의 정신을 이어받은 국제화  첨병으로서는 1949년 미국 선교 단체의 성금으로
개교한 일본  국제 기독교 대학을 꼽을  수 있다. 동경 외곽에  위치한 20만평의
이 대학은 <수위까지  영어를 한다>는 소문대로 교수의 26퍼센트가 외국인이며
강의는 영어로 진행하고 있다. 유엔 기구에 진출한  일본인 45명 중 국제 기독교
대학 출신자가 6명이나 된다. 이 대학은  패전의 폐허로부터 세계 유수의 경제대
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국제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
리나라에도 미션 계통의 대학이  있지만 40여년 이전부터 영어로 강의하면서 국
제인을 양성한 곳을 없었다. 이제서야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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