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의 운명1_by 성지식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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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03:20
기녀의 운명
인간은 "혼"과 "백"이라는 두 가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혼"과 "백"은 무엇인가?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백이라 부르고, 이미 백이 생기고 양기에서 움직이면 혼이라 부른다. 사람의 정기를 혼
이라 하고, 형체를 백이라 한다. "혼"은 정신적인 영이며, "백"은 육체적인 영으로, 전자가 죽어
서도 후손들의 제사를 받는 영원한 존재라면, 후자는 죽은 후 시체가 썩을 때까지만 존재하는 유
한한 존재이다.
고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정기인 혼이 형체인 백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혼을
불러 백에 되돌린 뒤에 땅에 매장해야 되며,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떠돌이 귀신이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체가 된 "백"을 가능한 오래도록 보존하려고 옥 같은 것들을 부장품으로 사용
하였다. 그리고 통치자가 죽으면 통치자의 도구나 노리개에 불과했던 여자들과 함께 매장시켜 사
후 세계에서까지 그의 소유가 되도록 했다. 이것이 순장 제도이다.
순장 제도는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사회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 말기에서
계급 사회 초기에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하상 시기 노예의 주인인 귀족이 기녀를 순장시
키는 일이 성행하였고, 도 이들을 죽여 조상이나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춘추 전국 시기 통치자들이 기녀를 순장하는 제도는 보편화되었다. 묵자는 "천자나 제후가 죽
었을 경우에는 순사자의 수가 많으면 수백 명이요, 적으면 수십 명을 헤아리게 된다. 장군이나
대부 등 높은 벼슬아치들이 죽어도 순사자가 수십 명에서 못돼도 대여섯 명은 넘는다"고 했다.
순장되는 기녀는 대부분 통치자 생전에 총애를 받던 여자들이다.
진대에 이르러 기녀의 순장 제도는 더욱 발전한다. "9월, 역산에 진시황을 안장하였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좇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여 명령을 내려서 모두 순장시켜 버리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처럼 진시황의 후궁
은 처첩 이외에도 수만 명의 여락가 궁기가 있었으며, 때문에 순장에 있어서도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봉건제의 탄생과 더불어 이러한 순장 제도에 불만의 소리가 높아 갔다. 기원전 621년,
진목공이 죽은 후 177명을 순장하자, "나라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황조]를 지었다." 또 "결초
보은"고사도 이런 순장을 반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사는 [춘추좌씨전, 선공 15년]에 나
온다.
춘추 시대에 진나라에 위무자란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애첩이 하나 있었다. 위무자는 병에
걸린 지 얼마 안되어 아들 과에게 "내가 죽거든 내가 아끼던 첩을 개가시키도록 하거라"라고 했
다. 그러나 병이 아주 위독해지자, 위무자는 다시 과를 불러 "내가 죽으면 내 첩도 순장시키도록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위무자는 죽었다. 그러나 과는 서모를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
켰다.
얼마 후, 진 환공이 역사 두회를 앞세워 진나라를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과는 참패했고, 목숨
마저 위태롭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과가 두회를 피해 있는 힘껏 도망치는데, 갑자기 뒤쫓아오던
두회가 풀밭에 쓰러졌다. 과는 달려가 두회를 붙잡고는 그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풀들이 모두 엮어져 있었다. 두회는 바로 이 풀 때문에 넘어진 것이었다. 그날 밤 과의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이 개가시켜 준 여자의 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선친의 유언
을 제대로 따랐기 때문에 죽을 뻔하던 내 딸리 살았소.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렇게 한 것
이고"라고 했다.
이 시기 처첩, 자녀, 기녀[노예]는 주인의 사유 재산이자 도구에 불과했다. 주인이 사후에도
이들을 거느리고 싶어하면 생순(산채로 매장하는 것)하거나 살순(죽여 매장하는 것)했다. 순장의
규모는 죽은 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였는데, "천자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백 명, 적게
는 수 십명 동원됐으며, 장군이나 대부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몇 명만을 동반했
다."
이후로 노예나 여자를 대신하여 나무나 진흙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든 인형을 부장품으로 이용하
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사람을 순장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2세 황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후궁과 장인을 순장시키는 일이 있었고, 또 명태조 주원장이
죽은 후 40명의 비빈과 궁녀를 순장하였다.
기녀들은 영기, 가기, 사기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비참한 삶을 살았다. 어떠한 기녀들은 부유한
탕자의 첩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버림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푸르고 푸른 방죽의 끝]이라는
시는 버림받은 창가 출신 여자의 한을 노래하고있다.
인간은 "혼"과 "백"이라는 두 가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혼"과 "백"은 무엇인가?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백이라 부르고, 이미 백이 생기고 양기에서 움직이면 혼이라 부른다. 사람의 정기를 혼
이라 하고, 형체를 백이라 한다. "혼"은 정신적인 영이며, "백"은 육체적인 영으로, 전자가 죽어
서도 후손들의 제사를 받는 영원한 존재라면, 후자는 죽은 후 시체가 썩을 때까지만 존재하는 유
한한 존재이다.
고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정기인 혼이 형체인 백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혼을
불러 백에 되돌린 뒤에 땅에 매장해야 되며,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떠돌이 귀신이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체가 된 "백"을 가능한 오래도록 보존하려고 옥 같은 것들을 부장품으로 사용
하였다. 그리고 통치자가 죽으면 통치자의 도구나 노리개에 불과했던 여자들과 함께 매장시켜 사
후 세계에서까지 그의 소유가 되도록 했다. 이것이 순장 제도이다.
순장 제도는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사회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 말기에서
계급 사회 초기에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하상 시기 노예의 주인인 귀족이 기녀를 순장시
키는 일이 성행하였고, 도 이들을 죽여 조상이나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춘추 전국 시기 통치자들이 기녀를 순장하는 제도는 보편화되었다. 묵자는 "천자나 제후가 죽
었을 경우에는 순사자의 수가 많으면 수백 명이요, 적으면 수십 명을 헤아리게 된다. 장군이나
대부 등 높은 벼슬아치들이 죽어도 순사자가 수십 명에서 못돼도 대여섯 명은 넘는다"고 했다.
순장되는 기녀는 대부분 통치자 생전에 총애를 받던 여자들이다.
진대에 이르러 기녀의 순장 제도는 더욱 발전한다. "9월, 역산에 진시황을 안장하였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좇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여 명령을 내려서 모두 순장시켜 버리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처럼 진시황의 후궁
은 처첩 이외에도 수만 명의 여락가 궁기가 있었으며, 때문에 순장에 있어서도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봉건제의 탄생과 더불어 이러한 순장 제도에 불만의 소리가 높아 갔다. 기원전 621년,
진목공이 죽은 후 177명을 순장하자, "나라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황조]를 지었다." 또 "결초
보은"고사도 이런 순장을 반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사는 [춘추좌씨전, 선공 15년]에 나
온다.
춘추 시대에 진나라에 위무자란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애첩이 하나 있었다. 위무자는 병에
걸린 지 얼마 안되어 아들 과에게 "내가 죽거든 내가 아끼던 첩을 개가시키도록 하거라"라고 했
다. 그러나 병이 아주 위독해지자, 위무자는 다시 과를 불러 "내가 죽으면 내 첩도 순장시키도록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위무자는 죽었다. 그러나 과는 서모를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
켰다.
얼마 후, 진 환공이 역사 두회를 앞세워 진나라를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과는 참패했고, 목숨
마저 위태롭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과가 두회를 피해 있는 힘껏 도망치는데, 갑자기 뒤쫓아오던
두회가 풀밭에 쓰러졌다. 과는 달려가 두회를 붙잡고는 그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풀들이 모두 엮어져 있었다. 두회는 바로 이 풀 때문에 넘어진 것이었다. 그날 밤 과의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이 개가시켜 준 여자의 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선친의 유언
을 제대로 따랐기 때문에 죽을 뻔하던 내 딸리 살았소.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렇게 한 것
이고"라고 했다.
이 시기 처첩, 자녀, 기녀[노예]는 주인의 사유 재산이자 도구에 불과했다. 주인이 사후에도
이들을 거느리고 싶어하면 생순(산채로 매장하는 것)하거나 살순(죽여 매장하는 것)했다. 순장의
규모는 죽은 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였는데, "천자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백 명, 적게
는 수 십명 동원됐으며, 장군이나 대부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몇 명만을 동반했
다."
이후로 노예나 여자를 대신하여 나무나 진흙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든 인형을 부장품으로 이용하
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사람을 순장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2세 황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후궁과 장인을 순장시키는 일이 있었고, 또 명태조 주원장이
죽은 후 40명의 비빈과 궁녀를 순장하였다.
기녀들은 영기, 가기, 사기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비참한 삶을 살았다. 어떠한 기녀들은 부유한
탕자의 첩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버림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푸르고 푸른 방죽의 끝]이라는
시는 버림받은 창가 출신 여자의 한을 노래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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