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 정사_by 성지식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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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3 09:20
혼외 성관계는 귀족 사회의 보편적 현상
혼외 성관계는 상고 시대 귀족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혼외 성관계를
표현한 말은 "통"이다. "통"자를 사용하지 않고 통간을 나타낸 것은, 선공 4년,
투백비와 운자의 여자가 사통하여 낳은 자문의 일에서 불 수 있고, 위령공은
사통한 부인을 용서해 준 유명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위후는 부인 남자를 위해 송조를 불러 조에서 만났다. 태자 과외는 위나라의
읍인 우를 제나라에 주고 송나라의 들을 지나게 되었는데, 농부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이미 당신의 아들을 구하는 어미 돼지를 만족시켰으니, 어찌 나의
아름다운 돼지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태자는 부끄러워했다.
이 인용문을 부연하자면 이렇다. 태자는 남자가 송조와 사통하여 "음행"을
저질렀음을 목격한 송나라 농부의 치욕적인 노래를 듣고 돌아와 남자를
죽이려고 하자, 위령공은 태자로부터 도망친 그녀의 손을 잡고 누대로 올라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래서 태자는 부득이 송나라로 달아나게 되었다.
위령공은 자기 아내와 다른 사람이 정을 통했지만, 그 일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당시 귀족들의 혼외 성관계에 대한 개방된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춘추 시대 또 하나의 유명한 사통 사건은 노환공 부인 문강과 문강의 형
제양공사이에서 발생했다.
환공은 출타하면서 강씨와 함께 제나라로 갔다. 노나라 대부 신수가 말했다.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는 것은 사로 경시할 수 없는데,
이것을 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점을 위반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됩니다."
환공은 제환공과 낙수에서 만나기로 하여 아내 문강과 나란히 갔다. 제양공과
문강이 간통을 저질렀다. 환공은 문강에게 욕을 했고, 문강은 이 일을
제양공에게 말했다. 여름 4월 병자일에 제양공은 노환공을 초대했다. 제양공은
공자 팽생으로 하여금 환공이 수레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고, 노환공은
수레 안에서 죽었다.
이 말을 좀더 풀어 보면, 노환공이 제나라로 갔을 때, 문강과 동행하자,
신수는 좋은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경계의 말을 했던 것이다. 환공은
문강과 제양공이 사통한 것을 안 후, 단지 그녀를 꾸짖었을 뿐인데, 그녀는
제양공에게 이 사실을 말하여 환공을 죽게 만들었다. 당시 환공은 이웃 나라의
국가 원수였다. 이후에도 문강은 거리낌없이 6년에 다섯 번은 제양공과 만났다.
춘추 시대 가장 음란한 사건은 하희롤 들러싼 풍파이다. 하희는 정목공의
딸로 진나라 대부 하어숙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하희라고 불려졌다.
진령공과 공녕, 의행부는 (똑같이) 하희와 사통을 했는데, 모두 하희의
속곳을 입고 조정에서 놀았다. 설야가 간언하여 말했다. "군주와 공경이
음라하면 백성들이 본받지 않겠습니까. 명성이 나쁜데 군주께서는 그녀의
속곳을 숨기십니까" 진령공이 말했다. "나는 고칠 수 있소." 진령공이 설야의
말을 공녕과 의행부에게 하니, 두 사람은 그를 죽일 것을 요청했다. 진령공은
반대하지 않고 설야를 죽였다.
진령공과 공녕, 의행부는 하징서와 술을 마셨다. 진령공이 의행부에게
"징서는 너와 비슷하구나"라고 하자, 의행부는 "또 군왕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징서는 그들을 원망했다. 진령공이 밖으로 나가자, 하징서는
마굿간에서 화살을 쏘아 그를 죽였다. 공녕과 의행부 두 사람은 초나라로
달아났다.
이렇듯 군주와 신하가 모두 음란하였으며, 끔찍스런 일이 발생했다. 초장왕은
하징서가 군주를 죽이는 무도함을 빌미로 다음해 봄 제후를 따라 진나라로
진군하여 하징서를 거열형에 처하고 공녕과 의행부를 맞이했다. 정벌을 한 후,
초장왕은 하희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초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다시 하회를
두고 다투게 되었다.
초장왕이 하희를 맞이하려고 하자, 신공 무신이 말했다. "맞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군왕께서 제후를 소집하는 것은 죄가 있는 자를 토벌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하희를 맞이하는 것은 그녀의 미색을 탐하는 것이며, 미색을 탐하면
음란하다고 하고, 음란해지면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만일 인솔한 제후 군대가
큰 벌을 받는다면 신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리십시오."
왕은 하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반이 그녀를 취하려고 하자, 무신이 말했다. "이 여자는 상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만으로 하여금 요절하도록 하고 어숙을 죽게 하고,
영후를 죽도록 하였으며, 하남을 죽게 했고, 공의를 내쫓고, 진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상처롭지 못함이 이와 같겠습니까! 인생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그녀를 취한다면) 좋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는 미녀들이
많은데, 하필 그녀입니까?" 자반은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초장왕은 자반은 모두 하희를 맞이하려고 하였지만, 정론을 내세우는 무신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장왕은 하희를 윤양로의 아내로 주었는데, 양로는
오래지 않고 죽고, 그의 아들이 하희에게 마음을 두려고 했다. 이때 무신은
하희를 정나라로 돌려보내자고 하면서 자신이 취했다.
남자, 문강, 하희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춘추 시대 귀족 사회의 혼외
성관계를 매우 공개적이고도 낭만적이었다.
[전국책.제책삼]에 이론 기록이 있다.
맹상군의 사인이 맹상군의 부인과 서로 사랑을 하자, 어떤 이가 맹상군에게
"그대의 사인은 안으로 부인과 서로 사랑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대는 그를 죽이시오"라고하자, 맹상군은 "모습을 보고 서로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니 그만두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또
제책이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진선 태후는 위축부를 사랑했다. 태후가
병으로 장차 죽게 되자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나를 장사지낼 때, 반드시
위축부를 순장하도록 하시오." 위축부가 이를 근심하자, 용예는 그를 위해
태후에게 말했다.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습니까?" 태후가 말했다. "지각이
없소." "만일 태후께서는 신령스러워 죽은 자에게는 지각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사랑하는 산 사람이 지각이 없는 죽은 사람에게 순장을
하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선왕의 축적된 노여움은 오래갈
것이고, 태후께서는 넉넉하지 못함을 구하고, 어느 틈에 위축부와
사통하겠습니까!" 태후는 "옳소. 순장시키지 마시오"라고 했다. 태후와
위축부의 사통은 조정 대신들까지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두들 이
문제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 시대도 귀족 사회의 혼외 성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당시
성 규범이 엄격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혼외 성관계는 상고 시대 귀족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혼외 성관계를
표현한 말은 "통"이다. "통"자를 사용하지 않고 통간을 나타낸 것은, 선공 4년,
투백비와 운자의 여자가 사통하여 낳은 자문의 일에서 불 수 있고, 위령공은
사통한 부인을 용서해 준 유명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위후는 부인 남자를 위해 송조를 불러 조에서 만났다. 태자 과외는 위나라의
읍인 우를 제나라에 주고 송나라의 들을 지나게 되었는데, 농부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이미 당신의 아들을 구하는 어미 돼지를 만족시켰으니, 어찌 나의
아름다운 돼지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태자는 부끄러워했다.
이 인용문을 부연하자면 이렇다. 태자는 남자가 송조와 사통하여 "음행"을
저질렀음을 목격한 송나라 농부의 치욕적인 노래를 듣고 돌아와 남자를
죽이려고 하자, 위령공은 태자로부터 도망친 그녀의 손을 잡고 누대로 올라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래서 태자는 부득이 송나라로 달아나게 되었다.
위령공은 자기 아내와 다른 사람이 정을 통했지만, 그 일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당시 귀족들의 혼외 성관계에 대한 개방된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춘추 시대 또 하나의 유명한 사통 사건은 노환공 부인 문강과 문강의 형
제양공사이에서 발생했다.
환공은 출타하면서 강씨와 함께 제나라로 갔다. 노나라 대부 신수가 말했다.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는 것은 사로 경시할 수 없는데,
이것을 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점을 위반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됩니다."
환공은 제환공과 낙수에서 만나기로 하여 아내 문강과 나란히 갔다. 제양공과
문강이 간통을 저질렀다. 환공은 문강에게 욕을 했고, 문강은 이 일을
제양공에게 말했다. 여름 4월 병자일에 제양공은 노환공을 초대했다. 제양공은
공자 팽생으로 하여금 환공이 수레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고, 노환공은
수레 안에서 죽었다.
이 말을 좀더 풀어 보면, 노환공이 제나라로 갔을 때, 문강과 동행하자,
신수는 좋은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경계의 말을 했던 것이다. 환공은
문강과 제양공이 사통한 것을 안 후, 단지 그녀를 꾸짖었을 뿐인데, 그녀는
제양공에게 이 사실을 말하여 환공을 죽게 만들었다. 당시 환공은 이웃 나라의
국가 원수였다. 이후에도 문강은 거리낌없이 6년에 다섯 번은 제양공과 만났다.
춘추 시대 가장 음란한 사건은 하희롤 들러싼 풍파이다. 하희는 정목공의
딸로 진나라 대부 하어숙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하희라고 불려졌다.
진령공과 공녕, 의행부는 (똑같이) 하희와 사통을 했는데, 모두 하희의
속곳을 입고 조정에서 놀았다. 설야가 간언하여 말했다. "군주와 공경이
음라하면 백성들이 본받지 않겠습니까. 명성이 나쁜데 군주께서는 그녀의
속곳을 숨기십니까" 진령공이 말했다. "나는 고칠 수 있소." 진령공이 설야의
말을 공녕과 의행부에게 하니, 두 사람은 그를 죽일 것을 요청했다. 진령공은
반대하지 않고 설야를 죽였다.
진령공과 공녕, 의행부는 하징서와 술을 마셨다. 진령공이 의행부에게
"징서는 너와 비슷하구나"라고 하자, 의행부는 "또 군왕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징서는 그들을 원망했다. 진령공이 밖으로 나가자, 하징서는
마굿간에서 화살을 쏘아 그를 죽였다. 공녕과 의행부 두 사람은 초나라로
달아났다.
이렇듯 군주와 신하가 모두 음란하였으며, 끔찍스런 일이 발생했다. 초장왕은
하징서가 군주를 죽이는 무도함을 빌미로 다음해 봄 제후를 따라 진나라로
진군하여 하징서를 거열형에 처하고 공녕과 의행부를 맞이했다. 정벌을 한 후,
초장왕은 하희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초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다시 하회를
두고 다투게 되었다.
초장왕이 하희를 맞이하려고 하자, 신공 무신이 말했다. "맞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군왕께서 제후를 소집하는 것은 죄가 있는 자를 토벌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하희를 맞이하는 것은 그녀의 미색을 탐하는 것이며, 미색을 탐하면
음란하다고 하고, 음란해지면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만일 인솔한 제후 군대가
큰 벌을 받는다면 신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리십시오."
왕은 하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반이 그녀를 취하려고 하자, 무신이 말했다. "이 여자는 상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만으로 하여금 요절하도록 하고 어숙을 죽게 하고,
영후를 죽도록 하였으며, 하남을 죽게 했고, 공의를 내쫓고, 진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상처롭지 못함이 이와 같겠습니까! 인생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그녀를 취한다면) 좋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는 미녀들이
많은데, 하필 그녀입니까?" 자반은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초장왕은 자반은 모두 하희를 맞이하려고 하였지만, 정론을 내세우는 무신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장왕은 하희를 윤양로의 아내로 주었는데, 양로는
오래지 않고 죽고, 그의 아들이 하희에게 마음을 두려고 했다. 이때 무신은
하희를 정나라로 돌려보내자고 하면서 자신이 취했다.
남자, 문강, 하희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춘추 시대 귀족 사회의 혼외
성관계를 매우 공개적이고도 낭만적이었다.
[전국책.제책삼]에 이론 기록이 있다.
맹상군의 사인이 맹상군의 부인과 서로 사랑을 하자, 어떤 이가 맹상군에게
"그대의 사인은 안으로 부인과 서로 사랑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대는 그를 죽이시오"라고하자, 맹상군은 "모습을 보고 서로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니 그만두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또
제책이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진선 태후는 위축부를 사랑했다. 태후가
병으로 장차 죽게 되자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나를 장사지낼 때, 반드시
위축부를 순장하도록 하시오." 위축부가 이를 근심하자, 용예는 그를 위해
태후에게 말했다.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습니까?" 태후가 말했다. "지각이
없소." "만일 태후께서는 신령스러워 죽은 자에게는 지각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사랑하는 산 사람이 지각이 없는 죽은 사람에게 순장을
하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선왕의 축적된 노여움은 오래갈
것이고, 태후께서는 넉넉하지 못함을 구하고, 어느 틈에 위축부와
사통하겠습니까!" 태후는 "옳소. 순장시키지 마시오"라고 했다. 태후와
위축부의 사통은 조정 대신들까지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두들 이
문제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 시대도 귀족 사회의 혼외 성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당시
성 규범이 엄격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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