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BDSM] 섭의 사물화(능동성까지 제거)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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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1 09:20
안녕하신가? 저번 시간엔 섭의 동물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원칙적으로는 평등한 둘 이상의 인간이 서로의 격차-높낮이-를 벌리는 방식 중의 하나다. 섭의 동물화란 무엇인가? 가학자에 의해-혹은 피학자의 동의에 의해- 피학자가 동물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일시적으로 피학자로부터 인격이 제거되고, 따라서 주체인 인간에 의해 관찰되고 제어되는 객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장치들이 첨가되기도 한다. 다음의 사진을 보자.
사진 속의 여자들은 아무래도, 취미생활을 영위하거나 잠시 짬을 내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 처지가 못 될 것 같다. 옷가지도 걸치지 못하고 저런 식으로 노역을 하고 있으니 사진 한 장만으로도 ‘주체’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흡사 로마시대의 갤리선을 연상케 한다. 노동력 충당이라는 기계적인 목표를 위해 집단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은 그녀들이 비인격적인 대상임을 뜻한다. 이 사진이 명백한 포르노그라피인 이유는 여성들의 모습이 누드일 뿐만 아니라 이 특정한 행위-노 젓기-가 SM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성적인 흥분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 종종 나체로 강제노동 따위에 동원되는 여자들을 상상하며 흥분하곤 했다. 물론 이런 상상은 지금도 한다. 보통 여성은 저런 형태의 노동을 하지 않는다. 신체를 단순/반복적으로 소모시키는 것은 남성들의 몫인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노예나 하인일지라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나눠져 있었던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여기엔 성차별적인 고정관념도 있겠지만 어쨌든 여성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여성성이 선천적인 것이든, 학습된 것이든지 간에-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는 오래된 방식 중의 하나다.
※ 나는 여성에게 ‘여성성’이라고 하는 특징을 부여하는 데 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성의 제거’는 여성에게 ‘인간으로서의 여성성’을 부여하는 오래된 관습에서 기인하는 것일 뿐이며, 나는 하나의 현상으로써 이러한 관습이 있다는 것 자체만을 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섭의 동물화로 돌아와서, 다음 사진은 어떤가.
도그플레이와 집단적인 노예화가 혼합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미지다. 이 사진은 이탈리아의 유명 시인 출신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가 연출한 1975년도 작품 [살로 소돔의 120일 (Salo, or 120 Days of Sodo)]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사람들의 평가는 물과 기름처럼 찬반양론으로 갈라졌는데, 물론 반대여론이 훨씬 많았다. 4명의 사디스트-그리고 파시스트-들이 순진한 소년소녀들을 납치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사실은 교묘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섹스노예로 길들인다는 내용에 박수를 보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영상도 엽기적이기 그지없고, 30년 전이라는 시대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욕을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없는 영화였다. 파졸리니의 동성애 파트너가 이 영화에 소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 친구는 맺힌 게 많았는지 나중에 파졸리니를 구타해 숨지게 한다. 기인답게 죽은 셈이다. - 그의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 만큼이나.
파졸리니와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파시즘의 광기를 고발한다.’고 평했지만 글쎄, 그런 점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일단 파졸리니가 변태인 것 같다. 노동력으로서든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서든,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진 몇몇의 목적에 의해 사진처럼 떼거지로, ‘집단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그만큼 각자의 개성과 인격의 농도가 희석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인/노예라는 1:1의 관계에 비교해 더 많은 가학-피학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장치가 된다.
주인을 자처하는 사디스트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개처럼 받아먹고 있는 소년소녀들. 이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행위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동물이라든가 노예라든가 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제어를 하려고 최소한의 ‘능동성’을 지니고 있다. 즉 살아있으며 자신만의 의지가 있고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 하더라도 그 신체를 1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노예 (혹은 동물) 자신이다.
나는 요즘 한 여성과 잠자리를 계속하고 있다. D/s나 SM 파트너 관계는 결코 아니지만, 그녀는 종종 혁대를 이용한 나의 채찍질을 받아내기도 하고 바닥에 엎드려 내 발을 핥기도 한다. 당연히 이 때 나의 성적인 흥분은 수직상승, 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고조된다.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기까지 하니 나로서는 행운이 겹친 셈이다.) 하지만 상상은 언제나 현실을 앞서가는 법이 아니던가. 말인즉슨 완벽은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녀의 행위나 자세 등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만족스럽지만, 그래도 나의 판타지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나와 그녀가 만들어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노예(섭)이라고 하는 인간, 내지는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불완전함이다. (가학적 변태인 내 입장에서의 불완전함이다.) 집요한 성격의 나로서는 완벽하게-내 욕구에 따라 정교하고 세밀하게- 제어되는 섭을 상상하게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다. (사실 이런 상상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상상일 뿐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상황에서 나는 그녀에게 나의 오른쪽 발등을 핥으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발등 위의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녀의 혀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녀의 등에 붉은 선을 그릴 수는 있지만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의 음량과 높낮이까지 조절할 수는 없다.
노예든 가축이든, 살아있는 동물-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라는 뜻에서-은 고유의, 그리고 최소한의 의지와 능동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서양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불교 용어로 ‘중생’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들의 위치를 줄 세우는 것을 좋아했다. 철학자들은 서로 잘도 싸우지만 여기에서만큼은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이 의견일치란 결국은 ‘인간-동물-(식물을 포함한)사물’의 순서로 위대하다는, 단순하고 고리타분한 도식을 말한다. 이것은 이성과 의지 따위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의 순서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의지, 능동성, 움직임(의 자유)을 상실한 완벽한 ‘대상’, 그것은 바로 사물이다. SMer들이 인간과 사물의 이런 관계를 활용하지 않을 리가 없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는 어느 정도이든, 어떤 형태이든 ‘섭의 사물화’를 욕망하게 마련이다. 다음 편에서 본격적인 섭의 사물화에 대해 논해보기 이전에, 일단은 노예/동물화와 사물화의 중간 단계를 거쳐보자.
위의 사진은 반디지 이미지에 속하지만 사물화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사실 신체를 구속하는 반디지도 의지 및 능동성 제거라는 측면에서 사물화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나무에 구속되어 있는 여성은 그저 나무와 함께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두. 왼쪽의 이미지 속에서 두 유두는 여성의 성감대나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구속이라는 목표를 위해, 얄궂을 만큼 얇고 작은 쇠사슬을 연결하는 고리나 경첩 정도일 뿐이다. 오른쪽의 이미지도, 도그플레이와 연관되어 있지만, 마찬가지다. 이렇게 신체는 물질적인 대상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위의 두 사진은 어떤가. 왼쪽의 오른쪽의 사진은 배경만 다를 뿐 나머지는 그대로다. 이것은 두 여성이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까지 그대로 멈춰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들은 방치되었거나 혹은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연작 이미지는 일차적으로는 반디지이지만 이차적으로는 가학이 행해지는 대상의 사물화를 표현하고 있다. 다음 사진은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성 한 명을 관장하고 있는 이 일본 SM 사진이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이미지의 대상이 다 큰 처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숙했지만 성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다. 몸은 성숙해서 포르노그라피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린아이인 그녀는, 의사-내지는 시술자-로 보이는 두 남성에게 자신의 은밀한 곳을 관찰당하고 있으며,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그녀를 치료의 대상으로 생각할 뿐 성숙한 인간(여성)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것 같다. 어린아이는 사람(성인)과 사물 중간의 단계일 수 있다. 돔들이 섭에게 기저귀를 채우거나 아기같은 행동을 시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미지다. 이번에는 하드코어의 영역을 밟아보자.
아이다 마코토 (Makoto Aida)
변태인 나도 이 사진을 보고 혐오감을 느꼈던 만큼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다. 팔다리의 일부가 절단된 저 귀여운 소녀는 아마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는 잔혹한 짓을 당한 직후지만 해맑은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 있다. 그녀는 강아지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개를 키우고 때로 먹기도 하지만 보통 저렇게는 하지 않는다. 동물의 신체는 최소한 임의대로 잘라서 제거해도 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동물과 사물의 중간단계야말로 가장 엽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으리라.
다음의 이미지들도 도를 넘는다.
보면 볼수록 은근히 역한 이미지들이다. 짐짝처럼, 혹은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처럼 다루어지는 인간의 이미지들 - 본격적으로 사물화되는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다음 시간에는 인간의 사물화 이미지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영국의 팝 아티스트 앨런 존스와 그의 작품들을 포함해 본격적인 사물화 단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연작(連作)인 만큼 금방 올릴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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